신념은 언제 아집이 되는가

— 끝까지 지키는 사람과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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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넘어서는 힘

나는 신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두려움을 느낀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때 두렵고,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할까 두렵고, 내가 틀렸을까 두렵다.

그런 두려움을 넘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 가운데 하나가 신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질문이 나왔다. “그러면 광신과 신념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광신을 감정이 이성을 집어삼킨 상태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반대되는 사실을 거부하고,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상태.

하지만 대화가 계속되면서 조금 더 어려운 문제가 나타났다. 광신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아집에 빠질 수 있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순간

나는 아집을 ‘집착’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어떤 좋은 목적이 있었을 수도 있다. 사람을 돕고 싶었고, 사회를 바꾸고 싶었고, 불의를 막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다. 처음 선택했던 방법을 지키는 일이 목적보다 중요해진다. 다른 사람이 더 좋은 방법을 알려줘도 듣지 않고, 새로운 사실이 나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시작했으니 내가 끝내야 한다.” “내 방법이 맞아야 한다.” 그때부터는 무엇을 이루려 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해질 수 있다.

공명심도 생길 수 있고 자존심도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여전히 ‘신념’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방법을 버릴 수 있는 신념

그렇다면 정말 강한 신념은 무엇일까. 나는 오히려 자신의 방법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더 강한 신념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살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내가 처음 생각했던 방법보다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발견됐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내가 처음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신념은 방향을 지키고, 아집은 방법을 지킨다.

신념도 검증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완벽한 기준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방법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외부의 질문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과 충분히 이야기해 보고, 반대 의견을 일부러 찾아보고, 내가 놓친 대안이 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그 대안이 정말 목적을 더 잘 이룰 수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자신의 등불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꺾기 위한 말인지, 정말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는 말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변화하는 신념

여기에서 ‘변화’라는 생각이 다시 등장한다. 나는 앞서 불변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념도 형태가 변할 수 있다. 오히려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20대의 내가 가진 신념과 60대의 내가 가진 신념이 완전히 같다면 그것이 반드시 좋은 일일까. 수십 년 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서 배신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넓게 이해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신념을 ‘절대로 바꾸지 않는 생각’이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다. 변화 속에서도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 계속 묻는 힘. 그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신념에 더 가깝다.

오늘의 질문

당신이 끝까지 지키고 있는 것은 정말 목적입니까, 아니면 한때의 자신이 내렸던 결정입니까?

※ 이 글은 AI와 실제로 나눈 문답을 바탕으로 사유의 흐름을 재구성한 「지혜와 쉼 별전」입니다. AI는 답을 대신하기보다 질문을 던졌고, 글의 판단과 해석은 대화를 통해 스스로 정리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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